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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 지방 출장을 다녀온 뒤, 현관 앞에 택배가 산처럼 쌓여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녹초가 된 몸을 씻고 짐을 정리한 후에야 비로소 그 택배들을 집 안으로 들일 수 있었는데, 그중에 작년 6월 주문했던 ‘베개 만년필 18K’가 눈에 띄었습니다. 긴 기다림 끝에 마주한 그 순간, 피로는 곧 호기심과 설렘으로 바뀌었습니다.
이 글에서는 개봉부터 실제 사용까지의 경험을 가능한 한 객관적인 시선에서 정리해보고자 합니다. 본 포스팅에서는 디자인에 대한 평가는 개인 취향이 크게 작용하는 만큼, 실사용 중 느낀 부분에 초점을 맞춰 말씀드리겠습니다. 제품의 컨셉이나 개발 스토리는 ‘겸손몰’ 또는 다른 블로그에 잘 소개되어 있으니, 별도로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1. 첫인상, 패키지의 아쉬움

포장 디자인은 제품의 첫인상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전반적으로 패키지 마감은 아쉬웠습니다. 흔히 ‘싸바리 박스’라 불리는 하드케이스 방식을 사용했는데, 박스를 감싼 원단이 다소 저렴해 보였습니다. 또한 구성품을 고정하는 인서트폼이 박스보다 크게 제작돼 가운데 부분이 볼록하게 휘어져 올라왔습니다. 보증서와 인서트폼의 색상 선택도 좋지 않았습니다. 배개 문양의 펄(Pearl)박 후가공과 합지(종이+스펀지) 인서트폼 제작 비용을 박스의 두께와 싸바리 원단 품질 향상에 투자했더라면 훨씬 고급스러운 느낌을 주었을 것입니다.

만년필은 직사각형 형태에 검정색 무광으로 마감되었습니다. 절제된 디자인이 단단하면서도 차분한 인상을 줍니다. 바디와 캡은 자외선에 강한 ASA 소재, 그립부는 SUS303 스테인리스로 제작되었습니다. 그립부에는 베개 문양이 음각으로 새겨져 있습니다. 캡과 그립 모두 촉감이 좋아 손에 쥐면 무의식적으로 자꾸 만지게 됩니다.

무게는 일반적인 만년필과 비슷하지만, 무게 중심이 그립부에 집중되어 오히려 가볍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캡을 제거하고 손에 쥐었을 때, 손가락과 아귀에 적당한 무게감이 전달되어 안정적인 필기감을 줍니다. 사용자에 따라 뒤쪽이 가볍게 날리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는데, 이 경우에는 캡을 꽂아 무게 중심을 뒤로 옮겨보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길이는 라미 사파리보다 약 8mm 정도 길어, 일반적인 만년필이 다소 짧다고 느꼈던 저에게는 만족스러운 길이였습니다.

SUS303 스테인리스 소재로 제작된 그립부는 은은한 무광으로 마감되어 세련된 인상을 줍니다. 그 위에 정밀하게 가공된 베개 문양은 고급스러움을 더합니다.

그립부를 잡고 화살표 방향으로 천천히 돌리면, 그립과 배럴이 자연스럽게 분리됩니다. 내부 나사산의 정밀도가 높아 회전 시 촉감은 부드럽고, 조립 시에도 흔들림 없이 안정적입니다. 일부 사용자 후기에 따르면, 그립부가 너무 단단히 결합되어 분리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제 경우에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 무리 없이 분리되었습니다.

잉크 컨버터는 나사 방식으로 장착되며, 결합 시의 유격이나 흔들림 없이 단단히 고정됩니다. 마감도 깔끔한 편으로, 투명한 몸체를 통해 잉크 잔량을 쉽게 확인할 수 있어 실용적입니다. 처음 사용 시에도 구조를 파악하기 어렵지 않아, 만년필에 익숙하지 않은 사용자도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2. 사각형 그립의 장단점

베개 만년필에서 가장 독특한 점은 그립부의 형상입니다. 1976년 신안 앞바다에서 인양된 고려청자 베개에서 모티브를 얻은 만큼, 일반적인 원형이 아닌 사각형 형태를 띠고 있습니다. 디자인적으로는 분명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지만, 실제로 손에 쥐었을 때의 느낌은 불편하다는 평이 많았습니다.
우선, 제조사에서 제안한 두 가지 파지법을 모두 시도해보았으나 불편함이 컸습니다. 모서리를 잡는 방식은 손가락에 통증을 유발했고, 양 옆을 쥐는 방식은 익숙하지 않아 펜이 손에서 쉽게 빠졌습니다. 결국, 아래 사진과 같이 윗면과 옆면을 각각 엄지와 검지로 잡고, 중지로 받치는 방식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이 경우 필기 각도가 자연스럽지 않아 손목을 안쪽으로 꺾어야 했습니다.




여러 파지법을 시도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펜촉과 피드를 함께 잡고 천천히 돌려보았습니다. 예상보다 무리 없이, 펜촉이 부드럽게 돌아갔습니다. 혹시 문제가 될까 싶어 곧바로 검색해보았고, 다행히 다른 사용자들도 같은 방식으로 각도를 조정해 사용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펜촉을 돌린 후, 좌우에서 본 펜촉의 모양
30도 가까이 조정해보고 싶었지만, 점점 강한 저항감이 느껴져 무리라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펜촉을 약 18~20도 정도 돌리는 선에서 멈췄고, 정면에서 보면 펜촉이 약간 틀어진 것이 눈에 띕니다. 다만, 이 방식은 안정성이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용 시 주의가 필요합니다. *이와 관련해 제작사에 문의해본 결과, 인위적인 조작이 있을 경우 무상 A/S는 불가하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다만, 사용자의 요청에 따라 펜촉 방향을 조정하는 작업은 가능하며, 유상 A/S로 진행된다고 합니다. (작업이 가능한 시기는 7월 정도라고 합니다. 참고하세요.)



펜촉 돌리는 방법 : 펜촉과 피드를 잡고 천천히 원하는 방향으로 돌리면 됩니다.
조정 중 펜촉이 피드와 어긋나면 펜촉만 잡아 다시 정렬해주면 됩니다.
3. 실제 필기 경험

슈미트의 18K 금촉은 필기감이 매우 부드럽고, 잉크 흐름도 안정적이었습니다. 종이에 닿는 순간 촉의 탄성이 느껴졌고, 저항감은 크지 않아 손에 힘을 거의 주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써 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장시간 필기 시에도 손의 부담이 적을 것으로 보입니다. 플래티넘 센츄리의 Soft Fine 닙이 떠오르긴 했지만, 그만큼 민감하거나 유연하진 않았고, 오히려 조금 더 탄탄하게 버텨주는 인상에 가까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종이를 살짝 긁는 듯한 거친 촉감을 선호하는 편이라 다소 밋밋하게 느껴졌지만, 유려한 필기감을 좋아하는 분들께는 분명히 큰 장점으로 작용할 것입니다. 특히 한글처럼 획의 연결과 끊김이 많은 문자 구조에서는 이러한 부드러움이 더욱 편안하게 다가올 수 있습니다.



좌. 밀크 프리미엄 종이 / 우. 사탕수수 종이
저중심 만년필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실제로 무게 중심이 낮다는 느낌은 분명히 들었지만, 그것이 한글 필기에서 더 편하게 작용하는지는 아직 확신이 서지 않습니다. 한글은 획을 끊어 쓰는 경우가 많아 저중심 설계가 적합하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제게는 그 차이가 뚜렷하게 느껴지지는 않았습니다. 이 부분은 좀 더 충분히 써본 뒤에야 제대로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4. 품질에 대한 생각

출시 전부터 극찬을 받았던 펜촉 품질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박종진 소장이 직접 ‘터치’한 펜촉이라는 설명을 보고 신뢰했지만, 실제로 받아본 펜촉은 팁이 미세하게 어긋나 있어 종이를 긁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이 정도는 사용자가 직접 조정해 쓸 수 있는 수준이지만, 보증서에도 ‘박종진 터치’라는 문구와 날짜가 명시돼 있었기에 기대는 더 컸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결과물이 그에 미치지 못했을 때의 아쉬움이 크게 다가왔습니다.

잉크는 적테가 예쁘게 뜨는 ‘디아민 마제스틱 블루’를 넣었습니다. 제품을 받은 후 3일 동안 매일 다섯 페이지씩 필사를 진행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나아지는 느낌은 들었지만 여전히 ‘헛발질’이 있습니다.

핑크색으로 표시한 부분처럼 첫 획에서 잉크가 끊기는 현상이 반복되었고, 붉은색으로 표시된 부분에선 획이 지저분하게 맺혔습니다. 이런 문제는 지금껏 경험해본 적이 없어 다소 당황스러웠습니다.


다행히 며칠이 지나면서 이러한 현상은 점차 줄어들고 있습니다. 다만, 왜 나아지고 있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습니다. 디아민 잉크와의 상성이 맞지 않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입니다. 이 부분 역시 좀 더 오래 써봐야 정확한 판단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5. 마무리하며

처음엔 디자인에 이끌렸고, 사용하면서 실망도 했지만, 조정 과정을 거치며 점차 애착이 생겼습니다. 실용성과 조형성 사이에서 완벽한 균형을 이루었다기보다는, 그 경계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고민하게 만드는 물건입니다. 단점이 더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 이상하게도 이 펜은 서랍 속에 잠들지 않고 자꾸만 손이 가게 됩니다. 완성도는 아쉽지만, 기획 의도는 분명했고, 그 점이 오히려 다음 제품을 기대하게 만들었습니다.
단순히 필기 도구로만 생각한다면 추천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펜은 손에 들고 쓰는 동안 ‘완성된 도구’라기보다는 ‘계속해서 사유하게 만드는 물건’에 가까웠습니다. 매끄럽지 않았던 사용 경험조차 이 펜의 성격처럼 느껴졌고, 그런 낯설음이 오히려 손에 자주 쥐게 만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음 작품인 ‘만년필 세종’을 기대합니다.
